2015-03-06

호구가 진상을 만든다?

진상이 있으면 그 반대에 호구가 있습니다. 진상은 가해자, 호구는 피해자인 셈입니다.

흔히들, "호구가 진상을 만든다."라고 하는데요. 전형적인,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한 문구입니다. 하지만 굉장히 자주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역시 그렇구요.

이 말만 들으면 마치 진상 때문에 피해를 당한 호구들이 뭔가 잘못한게 하나라도 있는 것 같은데요. 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진상의 잘못은 99.9%진상의 책임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돈을 빼앗겼는데, 돈을 내 놓은 사람이 잘못인가요? 강도의 잘못이죠. 평소 피해자가 돈자랑을 많이 했다면, 그 사실이 강도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나요? 아니죠. 그렇다면 자랑질이 그 사건의 원인이 되나요? 세상에 남의 자랑을 들은 모든 사람 중에서 단지 몇몇 강도들만이 강도짓을 했다는 것만 봐도, 자랑이 강도사건의 원인이 되기에는 너무 미약합니다.

맘이 약해서 남에게 모진 말을 하지 못하고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 호구가 되기 쉬운데요.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이 사람을 호구삼지않고 역시 단지 진상만이 이런 사람을 호구로 삼죠. 그러니까 호구가 진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상이 호구를 만드는 것이죠.

'호구가 진상을 만든다'는 잘못된 논리가 피해자를 더더욱 힘들게도 하죠. 안그래도 손해를 봤는데, '너도 뭔가 이 잘못에 기여한 바가 있다'는 관점이 피해자를 더 힘들게 합니다. 운나쁘게 피해를 당한 것만도 억울한데요...심하게는 가해자를 옹호하는 주장까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왜 이런 논리적으로도 틀리고 감정적으로도 가해자를 도와주는 셈인 이런 생각이 일견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일까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이 가진 어떤 종류의 편견인 것 같은데요. 가해자가 피해자를 괴롭혔다는 그 사실이 제 3자로서 뭔가 불쾌하게 느껴지는데, 피해자도 잘못한게 있어서 그 사건이 그럴만했다고 결론을 내려버리면, 제 3자로서 느껴지는 그 불쾌함과 마음의 짐이 없어지니까. 그런 어이없는 설명을 받아들이고, 사건 종료, 나는 맘편함. 이렇게 결론내리는거 아닐까요.